오드리헵번과 문리버(Moon Liver) 연주듣기

 

 

언제나 아름다운 모습과 아름다운 마음씨로 우리들의 기억속에 오래남을

배우 오드리헵번 그녀의 문리버가 오늘밤 무척이나 땡기네요 

 

 

 

모 CF에서 오드리헵번과 문리버음악의 영향이 컸을까?

기억이 오래 남는다.

 

 

 

영화 《로마의 휴일》 (1953)에서의 헵번
출생 Audrey Kathleen Hepburn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
사망 1993년 1월 20일
스위스 톨로체나츠(Tolochenaz)
활동 기간 1948년~1989년

 

 

 

오드리 헵번(Audrey Hepburn, 1929년 5월 4일 ~

1993년 1월 20일)은 영국의 배우이자 모델이다.

 

 

아카데미상, 토니상, 에미상, 그래미상 등을 받았다.

1999년에 American Film Institute에서 선정한

"지난 100년간 가장 위대한 100명의 스타"의

여성배우 목록에서 3위를 차지했다.

헵번은 UNICEF의 홍보대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오드리 헵번은 브뤼셀에서 영국의 은행가

조지프 앤서니 러스턴(Joseph Anthony Ruston)과

네덜란드의 귀족인 엘라 판 헤임스트라(Ella van Heemstra)

남작 부인의 딸로, 오드리 캐슬린 러스턴(Audrey Kathleen Ruston)

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성에 헵번을 붙이고 나서

오드리 헵번러스턴(Audrey Hepburn-Ruston)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오드리 헵번은 두명의 배다른 형제가 있었다.

 또한 에드워드 3세의 후손이기도 하다.

 캐서린 헵번, 험프리 보가트,

모나코의 레니에 3세와도 아주 먼 친척 관계가 있다.

 

 

 

1935년에 헵번의 부모는 이혼하였고,

나치의 추종자였던 헵번의 아버지는 가족을 떠났다.

 

 

 

오드리 헵번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식량난에 시달렸는데,

이러한 유년시절의 어려움은 그녀가 말년에 암으로 고통받으면서도

아프리카 어린이들을 보살피는 사회봉사를 실천하게 했다.

 

 

로마의 휴일 - 1953년
사브리나 - 1954년
전쟁과 평화 - 1956년
파계 - 1959년
티파니에서 아침을 - 1961년
샤레이드 - 1963년
마이 페어 레이디 - 1964년
어두워 질때까지 - 1967년
언제나 둘이서 - 1967년

 

 

남작 가문에서 태어나 나치에 협력한 아버지를 두었고

두 번의 결혼과 이혼을 경험했으며

말년에는 제3세계의 어린이들을 위한 구호활동에 전념했던

오드리 헵번의 영화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그녀...

 

오드리 헵번이 실제로는 ’헵번’가의 자손이 아니었고,

자신이 여섯 살 때 이혼한 아버지가 영국에서 나치 사상을

보급하는 최전선 역할을 했던 유럽통신회사에서 일했다는

등의 어두운 가족사부터 그녀를 스타덤에 올려 놓았다.

 

 

 

첫 남편 멜 퍼러와의 사랑과 이혼,

’로마의 휴일’에 같이 출연했던 배우 그레고리 펙과의 스캔들,

서른 명 정도의 하객만 참석한 가운데 스위스에서

조촐하게 치러졌던 두 번째 결혼,

말년 그녀의 영화 못지 않게

그녀의 이름을 세계인의 가슴 속에 깊이 각인시켰던

유니세프 친선대사 활동.

 

1년에 1달러 이외에는 어떤 보수도 받지 못하고 공식적인 출장과 숙박비 외의 모든 비용은 직접 부담해야 하며 현지의 풍토병에 걸릴 위험과 내전으로 인한 생명의 위협을 무릅써야 하는 친선 대사직에 스스로 유니세프 사무실을 찾아가 자원하고 “영화배우로서의 인생보다 아프리카의 고통받는 어린이들과 함께한 시간이 더 행복했었다”고 말하는 오드리 헵번의 모습을 통해 그녀가 지금까지도 ’만인의 연인’으로 사랑받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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